사진의 발명은 시대의 사회· 정치· 경제· 문화적인 면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예술계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사진은 그 안에서 예술로 자리 잡기 위한 부단한 노력들을 시도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복사하고 그나마도 기계에 의해 재현되는 사진은 예술로 인정받지 못 합니다.
하지만 사진가들은 끊임없이 예술작품의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들을 하고 이는 비평가들의 논평을 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보들레르는 과학과 기술의 부산물 정도라며 사진이 격상되는 것을 막으려 하지만 예술로서의 사진은 이미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 오스카 구스타브 레일렌더(Oscar Gustave Rejlader 1813~1875) 스웨덴
레일렌더는 1857년 당시의 회화를 그리던 방식과 구도 및 소재에 부합하는 사진을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80센티에 육박하는 인화지 위에
0여 장의 네거티브를 조합하여 <인생의 두 길>이라는 작품을 완성합니다.
작품의 내용은 선지자를 중심으로 한 쪽은 방탕과 타락의 길을, 다른 한 쪽은 근면과 신앙의 길을 제시하며 종교적 계몽을 주제로 표현한 것입니다.
레일렌더의 작품들
이 작품은 영국 왕실에게 인정받아 판매가 되었지만 위대한 졸작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매입 가격이 여느 작품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았으며 현실성이 강조된 사진에서 우화적인 소재를 재현하려고 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레일렌더의 작품은 1880년대를 기점으로 회화주의사진이 사진계의 주류로 자리 잡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하였습니다.
▷ 회화주의 사진 Pictorialism
1850년대 중반에 등장한 사진 사조 중의 하나로 사진이 예술을 생산할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고급 미술 사진’이라고 불렸으며, 회화적이라는 말은 곧 예술적인 것의 동의어로 해석되었습니다.
레일렌더. 드마시. 로빈슨의 작품
이 계열의 사진가들은 대부분 인상주의 풍에 영향을 받고 있었으며 회화나 드로잉과 흡사하게 만들기 위해 고무 인화법이나 합성 사진 같은 작위적인 암실 기법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까지, 그리고 미국에서는 1930년대까지도 유행했었으며 사진가로는 로베르 드마시, 구스타브 레일랜더, 헨리 피치 로빈슨 등이 있습니다.
▶ 헨리 피치 로빈슨(Henry Peach Robinson 1830~1901) 영국
레일렌와 더불어 조합 인화를 통해 예술성을 인정받고자 한 사진가입니다.
문학적이고 회화적인 내용들을 주로 다루었으며 레일랜더를 능가하는 사진 조합 실력으로 많은 작품들을 발표합니다.
당시의 조합 인화의 방법들은 대부분 예시 이미지처럼 밑그림을 스케치한 후에 이를 위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 합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
1858년 5장의 음화를 조합한 후 그것을 재촬영해 만든 <임종>이라는 작품이 가장 유명한 사진입니다.
이 작품은 임종을 앞둔 여인과 주변인들의 애절한 심정을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 로베르 드마시(Robert Demachy 1859 - 1936) 프랑스
로베르 드마시는 사진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무단한 노력을 기울인 사람입니다.
인간의 개입이 없이 자동으로 생성되는 이미지기 때문에 사진의 예술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해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작가의 개입을 강조했습니다.
주로 고무인화법과 주 피사체 외에 다른 부분들을 지우는 방식을 사용했으며 그의 작업은 석탄화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회화와 유사한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후에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 함께 [카메라 워크]를 발행하는데 참여했으며 픽토리얼리즘의 사진가로 명성을 얻습니다.
▶ 피터 헨리 에머슨(Peter Henry Emerson 1856-1936)
에머슨은 사진을 고급예술로 격상시키기 위해서는 이론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1889년 <자연주의 사진>을 출간하며 자연주의 이론을 사진에 대입하였습니다.
사진이 다른 시각예술과 동등한 지위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회화주의 사진가들이 행하는 수정행위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며
사진가의 역할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서 예술적 성취를 이루는데 있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사람의 화각과 가장 근접하다고 여겨지는 준망원 렌즈와 약간의 흐릿한 초점으로 촬영을 하며,
현실적인 톤의 재현에 적합한 백금인화를 통해 인간이 눈으로 보는 영상과 가장 비슷한 영상을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시각으로 사진을 만들어 내는 것이 그의 자연주의 사진이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자신의 이론이 완벽하지 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책을 출간한 지 2년 만인 1891년에 <자연주의 사진의 죽음>을 발표한다.
▷ 자연주의Naturalism와 회화주의 사진
에머슨이 자연주의 이론을 펼치면서 로빈슨의 조합인화와 수정을 가하는 방식의 픽토리얼 사진에 이의를 제기한 것은 분명하지만
1890년대에 확산되었던 회화주의는 이 둘의 이론적 배경이 융합되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에머슨의 자연주의 사진 이론은 로빈슨의 조합인화 방식보다 더 많이 응용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각종 사진 클럽들이 조직되면서 픽토리얼리즘 사진 운동이 전개됩니다.
1891년에 비엔나 카메라 클럽, 1892년 런던의 링크드 링(Linked Ling), 1894년 파리의 파리 포토-클럽이 발족되면서 예술사진 운동이 융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아 미국에서 1902년 스티글리츠가 중심이 된 Photo Secession을 결성하게 됨으로 픽토리얼은 한 시대의 지배적인 사진 조류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