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의 발전과 의식의 발전이라는 시대적인 변화와 함께 탄생한 사진술의 발전은 더욱더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특정 계층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초상화의 보편화가 그 변화의 중심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신분 상승의 대리만족으로 초상화를 소유하고자 했으며 이로 인해 수많은 사진관이 생겨납니다.
스코틀랜드 자유교회 1차 총
데이비드 옥타비우스 힐(David Octavius Hill 1801-1870) / 로버트 애덤슨(Robert Adamson 1821-1848) 스코틀랜드
1843년 스코틀랜드 교회의 분열을 기념하여 4백 명 이상의 대표와 성직자 외에 유명인들의 포트레이트를 촬영합니다.
당시 유명한 화가였던 힐이 구도를 정하고 기술자인 애덤슨이 촬영을 담당하였습니다.
애덤슨은 촬영 기술이 뛰어났으며, 힐의 격조 높은 예술 개념을 사진에 도입하여 유명해집니다.
명암과 포즈가 그들만의 포트레이트 스타일을 만들었으며 칼로타입을 이용해 제작했습니다.
힐과 애덤슨의 사진 작업들
앙드레 아돌프 디스데리(Andre Adolphe Disderi 1819~1889) 프랑스
사람들은 값싼 사진을 여러 장 만들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소망한다는 심리를 이용해 한 장의 원판에 8매의 인물사진을 찍어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1854년 명함판 사진으로 특허를 출원하고 사진의 일반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합니다.
정치인들과 유명인들이 홍보용으로 사용하는데 이용할 만큼 유명세를 치렀으며 나폴레옹 3세가 들러서 사진을 찍고 갈 정도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지만
시대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파산하고 객사합니다.
디스데리의 셀프 포트레이트
디스데리가 개발한 명함판과 나폴레옹3세의 초상사진
펠릭스 나다르(Felix Nadar 1820~1910 가르파스 펠릭스 투르나숑) 프랑스
디스데리가 저가의 명함판 사진으로 사진의 보편화에 기여했다면 나다르는 사진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다르는 단지 인물의 외형만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모델을 정신적으로 인지하여 촬영해야 한다는 르네상스시대의 초상 이론을 사진에 대입시킴으로
자신의 사진을 작품으로 격상시키고자 했습니다.
나다르가 촬영한 밀레와 보들레
캐리커처 화가였던 경력으로 인물들의 개성과 직업의 세계를 잘 파악해 드러냈으며 인물 주변의 장식이나 옷가지가 아닌 인물 자체의 모습으로 사진의 힘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초상사진은 그래서 최초의 사진적인 사진으로 손꼽히며 현대의 초상사진들과 견주어봐도 전혀 뒤지지 않는 세련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나다르의 항공사진에 대한 삽화와 실제로 촬영된 파리의 모습 (1866)
1858년에는 항공사진에 대한 발명 특허를 출원하여 열기구를 이용해 촬영을 성공했고, 1861년에는 인공광원 사진에 대한 특허를 출원하여 지하묘지를 촬영하였습니다.
이는 습판술을 사용하는 당대의 사진술을 감안해본다면 정말 획기적인 방법들입니다.
인공조명을 활용해 촬영한 카타콤베 (지하공동묘지)
나다르는 초상사진의 예술적 가치를 격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실험적인 시도를 통해 사진의 기술적인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합니다.
줄리아 마거릿 캐머런(Julia Margaret Cameron 1815~1879) 영국
캐머런은 개인적으로 친분관계가 밀접했던 사람들을 중심으로 문학작품의 장면을 연출하는 초상사진을 주로 찍었습니다.
인물들의 성격을 평상시 잘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성격에 맞는 역할을 주었으며 초점을 흐리게 하여 주변을 뿌옇게 하여 촬영해 신비로운 느낌을 연출하고자 했습니다.
마거릿 캐머런의 작업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