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의 서구 문명은 혁명의 시기입니다.
산업혁명(영국 1764년-경제 혁명)과 독립혁명(미국 1776년-정치혁명),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1789년 프랑스-사회혁명)을 겪으면서 봉건주의와 권위주의적 사고와
생활에서 자유주의와 평등사상의 사회로 탈바꿈하는 과도기를 겪게 됩니다.
혁명으로 인한 사회경제적 팽창은 보다 많은 정보를 필요로 하게 개인의 자유와 의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며 인류평등주의가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같은 변화는 자연스레 예술계에서도 반영되었고 언제나 역사적이고 신화적인 소재로만 제작되던 회화 역시 권위적인 소재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완성작의 대형화에서도 탈피하게 됩니다. 이와 더불어 경제적으로 성장한 부르주아 계층의 취향 역시 미술가들에게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들은 사적이면서도 정서적인 내용의 초상화와 풍경화, 정물화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고 예술가들은 그러한 수요에 맞는 내용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됩니다.
또한 경제적 팽창과 자유주의 확산은 부르주아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초상화에 대한 소유욕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습니다.
그동안 초상화는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만 인식되고 있었는데 시대적인 변화로 인해 이 인식의 틀이 깨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초상화는 이례적인 호황을 누리게 되었으며 화가들은 보다 더 경제적이며 효율적인 방법들을 필요로 했고 다양한 결과물 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카메라 옵스큐라와 카메라 루시다
사진 탄생의 시대적 배경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위에서 언급했던 범사회적인 인식의 변화와 초상화의 발전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다음의 내용이 한 가지 추가됩니다.
초상화를 향한 수요의 증가도 사진의 발명을 재촉했겠지만 그보다 더 사진을 필요로 했던 곳은 아마도 여러 식민지들을 가지고 있었던 열강들 그 자체가 아닐까 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정복지에 대한 신속하면서도 객관적인 정보가 필요했습니다. 이에 기계가 자동으로 생성해주는 사진만큼 확실한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프랑스 정부가 다게르의 사진술을 매입한 것을 봐도 이를 알 수 있으며 아라고의 연설문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공식적인 사진의 발명은 1839년 8월 19일 프랑스의 다게르에 의해서입니다.
모든 발명품이 어느 날 갑자기 튀어나올 수 없지만 여러 가지 배경으로 본다면 사진은 어쩌면 너무 늦게 나온 것입니다.
지루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등장했고 다게르에게 발명가의 지위를 놓친 다른 사람들 역시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자연과학의 발달 시기와 견주어 본다면 많이 늦은 것입니다.
다게르의 발표 이전에 이미 이미지를 고착할 수 있는 방법들이 연구된 상태였고 가시적인 결과물도 이미 등장했을 때입니다.
다게레오타입 스튜디오
이는 정보의 교류가 원활하지 못했고 특허에 대한 욕심 때문일 것입니다.
니엡스와 다게르의 정보 공유가 사진 발명의 물꼬를 텄고 니엡스가 이를 매우 꺼려했다는 것이 이를 반증하고 있습니다.
발명가들의 교류가 좀 더 활발했더라면 100년은 더 미리 사진이 나왔을 법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