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사진의 등장
사진이 나오기 전의 시대에서는 사람들이 전쟁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귀향하는 군인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를 듣거나 그림과 문학을 통한 간접적 경험 정도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진이 발명된 이후 전쟁의 상황을 생생히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사진의 리얼한 세부 묘사는 사람들의 강력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대중들은 보다 더 정확하고 많은 양의 전쟁 사진들을 원했고, 언론과 권력은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로저 팬튼(Roger Fenton 1819~1869) 영국
팬튼은 크리미아 전쟁을 종군하게 되는데 이는 영국 왕실의 후원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영국 왕실의 목적은 해외 전쟁 파병에 대해 국민들이 품는 극도의 불안감을 불식시키는데 있었습니다.
때문에 팬튼은 이러한 목적에 부응하는 전쟁의 영상을 찍어냅니다.
부상당한 병사가 치료를 받고 있는 장면이나 전쟁과는 상관없는 풍경사진들을 위주로 보여주게 됩니다.
아래 사진은 팬튼의 크림전쟁을 대표하는 사진으로 연출을 통해 만들어진 장면임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로 작위적인 사진입니다.
부상당한 병사에게 와인을 건네주고있는 크림전쟁 사진
전쟁의 실상과 전혀 상관없는 크림전쟁 사진
팬튼의 사진 작업은 전쟁의 불안한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하는 일반 국민들의 욕망을 이용해서 경제적인 이득을 취하려는 출판 자본가와,
동요하는 민심을 사진의 사실적인 힘(사진은 실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재현한다는 대중들의 완곡한 믿음)을 이용해 수습하려는 정치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조작된 사진들입니다.
이러한 보도사진의 왜곡은 권력이 사진가의 관점과 시각에 보이지 않는 지침으로 작용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매튜 브래디(Mathew B. Brady 1823~1896)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브래디는 링컨의 선거용 초상을 찍은 인연으로,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사진가로서 북군에 종군하여 남북전쟁을 기록하였습니다.
브래디의 남북전쟁 사진은 크리미아 전쟁에서의 펜튼의 낭만적인 전쟁 사진과는 달리 폐허가 된 전쟁터의 모습을 실제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860년 링컨의 선거용 사진
페허가된 남북전쟁 사진
알렉산더 가드너(Alexander Gardner 1821~1882) 영국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브래디를 따라 종군 사진반에 참가하였으나, 의견 대립으로 브래디와 결별하고 독자적으로 전쟁 장면들을 찍기 시작합니다.
가드너의 사진은 남북전쟁의 사진들 중에 가장 뛰어난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863 년 워싱턴에서 자신의 스튜디오를 개설하고 게티즈 버그에서 전장 사진을 계속 찍었습니다.
Lewis Paine 1865 - 링컨 대통령 암살 공모자
가드너는 훌륭한 초상화 사진작가로 알려졌으며 많은 정치인들의 초상사진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링컨을 암살하기 위해 음모에 가담했던 공모자들의 초상을 찍었는데 이 사진은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이라는 책에 사용되면서 많이 알려진 사진입니다.
1866년 100장의 원판 사진을 수록한 <가드너의 남북전쟁 사진집>을 발간하였고 전후 서부 개척 · 철도건설 ·인디언의 생활 모습 등을 찍어 귀중한 자료를 남겼습니다.
티모시 오설리반(Timothy H. O'Sullivan 1840~1882) 미국
브래디의 사진관에서 사진을 시작했던 설리반은 대담한 사진들을 많이 찍은 걸로 유명한데 병사들의 시체가 버려진 들판을 촬영한 <죽음의 수확 Harvest of Death 1863>이 유명합니다.
남군을 반역자로 묘사함으로써 사진이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는 한 예에 속하기도 합니다.
전후에 다른 사진가들과 마찬가지로 서부의 지형학적인 사진 작업에 참가하여 많은 사진을 남겼습니다.